세계 철강산업의 질서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한때 철강 교역의 핵심 기준은 효율과 가격 경쟁력이었지만나 지금은 공급망 안정, 경제안보, 탄소중립, 제조업 기반 유지가 더 중요한 정책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철강은 단순한 전통산업이 아니다. 자동차, 조선, 건설, 에너지, 방산은 물론 전기차, 반도체 장비, 전력망, 재생에너지 산업을 뒷받침하는 핵심 소재다. 제조업 가치사슬의 최상단에 위치한 철강의 생산 기반이 흔들리면, 국가 제조업 전체의 경쟁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탄소배출 부담이 크지만 높은 재활용성과 전 생애주기 관점의 소재 경쟁력을 고려하면 철강은 축소가 아닌 고도화해야 할 전략산업이다.
문제는 글로벌 공급과잉이다. 지난해 기준 세계 조강 생산능력은 약 24억5천만 톤으로, 수요 18억 톤을 6억5천만 톤가량 초과한다. 2028년에는 과잉 규모가 7억 톤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중국의 철강 수출은 지난해 약 1억3천만 톤으로 전 세계 수출의 약 29%를 차지한다. 이러한 구조가 지속되면 저가 수입재 유입은 개별 기업의 수익성 악화를 넘어 국내 생산 기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주요국은 이미 철강을 경제안보의 핵심 문제로 다루고 있다. 미국은 고율 관세를 통해 수입을 억제하는 동시에 자국 내 생산과 투자를 유도하고 있고, EU는 에너지, 탄소, 보조금, 무역규제를 결합한 종합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도 철강을 국가안보와 회복력의 문제로 보고 보조금, 수입 방어, 국유화까지 포함한 적극적 개입에 나서고 있다. 철강정책이 단기 수입규제에서 국가 차원의 중장기 전략으로 전환된 것이다.
한국 철강산업도 엄중한 전환점에 서 있다. 2025년 한국의 조강 생산량은 6,200만 톤으로 세계 6위 수준이지만, 2022년 이후 생산 감소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한국은 세계 3위 철강 수출국임에도 주요국의 수입규제 강화로 수출 여건이 악화되고 있다.
이제 한국도 철강을 ‘전통산업’이 아니라 ‘국가 전략산업’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철강 주권은 폐쇄적 자급자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서도 국가 제조업을 지탱할 최소한의 생산 기반, 미래 산업에 필요한 고급 소재 공급 능력, 탄소중립 시대에 대응할 기술 역량을 확보하자는 의미다. 자동차, 조선, 방산, 에너지 산업의 경쟁력은 결국 안정적인 철강 공급 능력과 맞닿아 있다.
정책 방향도 한층 정교해져야 한다. 우선 ‘K-스틸법’을 중심으로 탈탄소 설비 전환,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고도화, 저탄소 원료 확보, 전력비 부담 완화, 연구개발 및 금융·세제 지원을 하나의 실행 체계로 묶어야 한다.
우선 저탄소 철강의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공공 인프라, 에너지 설비, 조선, 자동차, 방산 등 전략 수요산업에서 저탄소 철강 사용을 촉진하는 조달·인증·인센티브 체계가 필요하다. 생산 전환만 있고 수요 창출이 없다면 친환경 투자는 기업의 비용 부담으로만 남는다. 불공정 수입재에 대한 대응 역량도 중요하다. 글로벌 공급과잉과 보조금 경쟁이 구조화된 상황에서 국내 시장을 무방비로 둘 수는 없다. 통상규범에 부합하는 범위 안에서 무역구제 조사 역량, 원산지 관리, 탄소비용을 반영한 수입 대응 체계를 정교화해야 한다.
앞으로 철강 경쟁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산업생태계 경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 철강업계, 수요산업, 에너지 기업, 연구기관, 금융기관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철강 주권을 지키는 일은 철강업만의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제조업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며, 경제안보 시대에 반드시 붙들어야 할 국가 전략이다.

